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의문점 (문단 편집) === 계엄군의 발포 현황 === || # || 날짜 || 시간 || 발포장소 || 발포한 부대 || 비고 || || 1 || 1980년 5월 19일 || 오후 4시 50분 || 계림동 || 11공수 63대대 || 최초의 발포, 1명 부상 || || 2 || 1980년 5월 20일 || 밤 11시 30분 || 광주역 || 3공수 || 최초의 집단발포, 최소 5명 사망 || || 3 || 1980년 5월 21일 || 낮 12시 || 전남대학교 앞 || 3공수 || 최소 2명 사망 || || 4 || 1980년 5월 21일 || 오후 1시 || 전남도청 앞 || 7공수 35대대, 11공수 61·62·63대대 || 최소 54명 사망 || ||<-6> 이후 1980년 5월 21일 오후 2시[* 실제로는 20일 밤 11시 20분에서 21일 오전 사이일 가능성이 크다.]에 열린 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결정 → 광주시민 공격 및 학살 || 계엄군의 최초 발포는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발생했다. 시민들에게 쫓기고 있던 장갑차에서 퇴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총을 발사한 것이다. 이 일로 고등학생 1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장갑차에는 차씨 성을 가진 11공수여단 63대대 대위 하나가 타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 날 보안대에서 간단한 조사만 받고 부대로 복귀했다. 헌데 이 '''발포는 그가 복무하던 11공수여단과 상위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상황일지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보안부대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계엄군의 소행이 아닌 '불순세력의 선동수법'으로 치부하며 발포를 부인했다. 한편 다음 날 5월 20일 밤에는 광주역에서 3공수여단에 의해 최초의 집단발포가 발생했다. 당시 광주역에서의 상황은 시민들과 계엄군들 간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양측의 대응은 과격해졌고, 각 부대장들은 실탄 지급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오후 10시 30분에 3공수여단장이 "경계용 실탄은 위협사격용으로만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에 사용할 때는 사전에 보고하라"며 실탄을 각 부대에 지급하였다. 밤 11시 15분, 광주역에 있던 3공수 병력에는 누군가로부터 '''실탄 장전 및 발포 명령'''이 하달되었다.[* [[http://www.sisa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51]]] 이후 오후 11시 30분[* 현재 수많은 5.18 자료에는 광주역 집단발포가 20일 '''밤 11시경'''에 일어났다고 모호하게 기록돼 있거나 '''밤 11시 30분'''에 발생했다는 기록과 증언들이 있다. 그러나 광주역에서 발포했던 3공수 병력에 발포명령이 하달된 시각이 '''밤 11시 15분'''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3공수가 발포한 시각은 '''밤 11시 30분'''임이 사실에 가깝다. [[http://www.hani.co.kr/arti/PRINT/789479.html|#]]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1/06/0200000000AKR20171106146000054.HTML|#]]]에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집단발포했다. 이로 인해 4~5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 발포도 3공수여단과 상급부대의 기록에는 빠져 있다.''' 광주역 발포는 별도로 파견된 정보원들의 정보 수집을 통하여 31사단과 전교사에 알려졌다. 한편 이날 밤 10시 30분, 2군사령부에서는 '''"발포 금지, 실탄 통제"'''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는 계엄군 지휘관들이 '''독단적으로 부대원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발포명령 없는 발포'''가 잇따르는 비상식적인 현상들이 일어났다. 밤 11시 4분에는 아세아자동차나 서부경찰서 쪽에서 LMG 연발총성이 들렸고, 밤 11시 20분에는 광주시청 옥상에서 공수부대가 예광탄으로 위협사격을 했다. 밤 11시 30분에는 계림동 파출소에서 총성이 3,4발씩 울렸고, 같은 시각 광주역 집단발포가 일어났다. 밤 11시 35분에는 계림동 사무소에서 총성이 울렸다.[*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81~82쪽] 5월 21일에도 집단발포가 발생했다. 이 때의 집단발포는 20일의 그것과 비교해서는 대규모였고, 조직적이었다.[* 21일의 집단발포는 당시의 정황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했을 때 우발적 성격이 아닌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이 강했던 반면, 20일의 집단발포는 계엄군에 대한 시민들의 공격이 치열했고 사상자도 비교적 적었기에 우발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 20일 광주역 집단발포가 발포명령에 따른 계획적, 체계적 발포였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시민들의 공격이 심하지도 않은 상황 속에서, 일제히 집단사격하고 저격수와 기관총까지 동원하여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의 경우에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미 10시 10분 경에 11공수여단 63대대는 1인당 10발씩 실탄을 지급받았고, 이에 놀란 전북도지사는 [[윤흥정]] 계엄분소장에 연락을 걸어 "발포만은 삼가달라"고 호소했다. 계엄군 측에서는 11공수여단 61대대장이 도청 앞에 있는 4개 대대[* 당시 도청 앞에 있던 계엄군 부대는 11공수여단 61,62,63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였다.]의 총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상황은 갈수록 일촉즉발로 치달았다. 상부에서는 '선무활동을 강화하라'는 지시만 내려오기에 61대대장은 "도대체 상부에서는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거냐?", '''"발포를 할 것인지, 철수를 할 것인지, 어떤 지시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화를 냈다. 그러던 중 12시 30분 경 전남매일신문 기자 나경택이 공수부대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발포명령 어떻게 됐나?" >"아직 안 떨어졌습니다." >그로부터 10분 정도 지났을까? 통신병이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발포명령입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 나경택의 증언, <한국기자협회보> 2010년 5월 12일자] 오후 1시가 되기 직전에 시민들과 군인들의 충돌이 발생하면서 분수대 쪽 광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향해 발포가 발생했다.[* 이 발포로 버스를 운전하던 1명이 사망했는데 이 때의 발포는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오후 1시 정각에 애국가가 울리더니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발포를 시작했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서 조준사격과 [[저격]]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후 오후 2시경 국방부장관실에서 열린 회의[* 이 회의에는 국방장관 주영복,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병현, 보안사령관 전두환, 수경사령관 노태우, 육사 교장 차규헌, 특전사령관 정호용 등이 참석했다.]에서 자위권 발동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제5공화국 전사> 4권, 보안사령부, 1982, 1653~1654쪽, 이 기록에는 '전 각하:초병에 의한 난동 시 군인복무 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적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